역사는 창작소설이 아니다. 사료를 통해 과거의 사실을 재구성해야 한다. 정치적 목적이나 타국을 침략할 목적으로 역사를 왜곡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우리 나라는 수상한 목적 하에 쓰여진 소설이 역사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창작소설 수준의 유사역사학이 판을 치고 있다. 강단유사사학 카르텔은 실증주의를 표방하나, 그들의 유사논문에 실증은 전혀 없다. 일제의 한국사 날조에 부역한 부역자들이 해방 후 역사학계의 학문권력을 장악하고 그들의 부역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실증을 표방하였다. 부역자들에 영합한 사람들만 부역자들의 승계자로서 교수가 되고 국가기관에 취직을 하였다. 이들에 반대하면 환빠라 간주하면서 스스로 생각하려 않는 이들은 매국노 승계자들의 가짜 역사를 따르는 것을 지식인의 요건이라 생각한다.
낙랑군은 조선이 아니라 한나라 영토에 설치된 군이다. 당시 전쟁에 이기면 토착세력을 무력화하기 위해 이주시키는 것이 관행이었다. 중국 측 사료에 의해 낙랑군이 요동고새 내부의 원래의 한나라 영토에 있었다는 것이 입증된다. 삼국지와 후한서는 단군조선이 신한(진한) 마한 변한의 삼한이었다는 것을 입증해준다. 삼국사기에 나오는 부여는 추모(주몽)가 도망친 동부여와 비류가 세운 예부여(비류백제)의 두 개이다. 고려를 세운 왕건은 중국 동해안의 백제유민 세력을 기반으로 하였다. 대왜(소위 야마토왜)는 백제 주민이었던 전라도 왜가 신라로 도망가서 포로로 지내다가 광개토대왕의 명령으로 나라의 고구려 분국에 이송된 피지배민이다. 도대체 야마토라는 왜계 정권이 성립될 여지가 없다. 열도는 가야계의 지배, 백제의 담로 지배, 5세기 백제와 고구려의 남북국 시대, 6세기 이후 백제 지배의 역사를 거친다. 칭기즈 칸은 震國王인데, 이는 그가 大震(발해)을 계승하였음을 의미한다. 백제와 신라의 건국지는 황하하류이다. 추모(주몽) 즉 고구려는 한나라의 부용세력으로 출발했고, 유리왕은 왕망에게 목이 잘려 죽었다. 홍산문화는 신시국을 증명한다. 하가점하층문화는 삼한조선(고조선 전기)을 증명한다. 치우는 신시국에서 남하하여 먼저 와서 중국인을 지배했던 황제와 싸웠다. 번조선은 중국 동부를 지배했다. 서언왕은 번조선 남부의 왕이다. 칼돈은 고조선의 화폐이고, 칼돈이 발견되는 곳은 고조선의 강역이다. 만리장성은 북경 남쪽 보정시에서 시작한다. 필자의 이러한 주장은 거짓말이거나 정신나간 환빠의 주장으로 들릴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주장은 객관적 사료에 기반하고 있다. 간명하게 기존의 주장을 무력화할 수 있는 아래 사례를 살펴본 후에, 필자가 정신나간 환빠인지를 판단해도 늦지는 않을 것이다.
『삼국지』는 대방군에서 韓을 지나 남으로 동으로 7,000여 리를 가야 김해에 도달한다고 한다. 대방군이 황해도라는 강단유사사학계의 주장은 소설에 불과하다. 『후한서』도 낙랑군의 변경 즉 대방군에서 김해까지 7,000여 리라 한다. 당시에 韓은 황하 하류의 동쪽, 제수의 북쪽이었고 낙랑군과 대방군은 韓의 서북쪽이었다.
동천왕은 관구검에게 패하였는데, 『삼국지』 「위서 관구검전」, 『양서』 「동이전」, 『북사』 「고구려전」에 의하면 관구검은 동천왕이 옥저로 도망가자 왕기를 시켜 추격하게 하였고, 추격군은 옥저를 지나 1,000여 리를 추격하여 관구검기공비를 세웠다. 그 관구검기공비가 집안 판석령에서 발견되었다. 『삼국지』 「위서 관구검전」은 중국인들의 입장에서 조조의 위나라가 고구려를 통쾌하게 이긴 것을 기록한 것이므로, 왜곡할 가능성이 없는 부분이다. 합리적으로 생각하면 집안 서쪽 1,000여 리에 옥저가 있었고 그 서쪽에 고구려의 수도가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런데 강단유사사학계는 옥저는 한반도 동해안에만 있었다고 하며 집안이 당시 고구려의 수도였다고 한다. 그들은 『삼국지』 「위서 관구검전」, 『양서』 「동이전」, 『북사』 「고구려전」이라는 사서와, 관구검기공비를 무시하고 옥저의 위치와 고구려의 수도와 강역에 관해 소설을 쓰고 있다.
『수서(隋書)』는 고구려에 평양성 國內城 漢城의 세 도회지가 있다고 한다. 그런데 현재의 평양에서 漢城이라 기록된 고구려의 각자성석(刻字城石)이 출토되었다. 고구려의 평양은 고려시대 때 서경이라 하였다. 김부식은 묘청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서경으로 가면서 안북대도호부에 이르러 다른 부대와 합류하는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안북대도호부가 지금의 안주라고 한다. 그들의 말에 따라 고려의 서경을 지금의 평양이라 하면 모든 토벌군이 서경으로부터 북쪽으로 직선거리 70km까지 간 것이 된다. 이런 상황에서는 반란군이 바로 개경으로 남하하여 임금을 모시면 순식간에 반란군과 토벌군의 위치가 바뀌게 된다. 즉 지금의 평양을 고구려의 평양으로 볼 수는 없고 고구려의 평양은 최소한 안주 북쪽에 있었고, 현재의 평양은 각자성석이 밝히는 바와 같이 고구려의 漢城이라고 보아야 한다.
강단유사사학은 단동에서 발굴된 기와에 ‘安平樂未央(평안함과 즐거움이 다하지 않기를)’이라는 문구가 발견된다고 하여 단동이 서안평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여대(旅大)에서 출토된, ‘長樂未央(늘 즐거움이 다하지 않기를)’명 기와에 대해선, 여대가 장이라는 도시였다고 보지 않고, 長樂未央 전체를 길상구로 본다. 단동을 서안평으로 날조하여 조선총독부 소설을 지키기 위해 그들은 길상구까지 지명으로 만드는 저질 천재성을 발휘한다.
동성왕 시 백제와 위의 전쟁에 관해선 권위 있는 중국 역사서 다수에 기록되어 있다. 백제와 위는 세 차례나 전쟁을 하였다. 제1차 전쟁은 484년 있었는데, 이는 『건강실록』, 『태평환우기』, 『통전』에 기록되어 있다. 『건강실록』은 변도라고 백제왕의 이름까지 기록하고 있다. 제2차 전쟁은 488년 있었는데, 『자치통감』과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다. 『자치통감』은 사마천의 『사기』와 비슷한 정도의 권위를 인정받고 있는 사서인데 전쟁이 12월 있었다는 사실까지 알려주고 있다. 『남제서』에도 제2차 전쟁의 세세한 묘사가 기록되었을 것으로 추측되는 부분이 있으나 현재는 지워진 상태이고, 490년 위의 백제 침공 시 ‘위 오랑캐가 또다시 기병 수십만을 동원하여 백제를 공격하여’라고 하여 490년 가까운 시기에 침공이 있었음을 밝히고 있다. 제3차 전쟁은 490년 있었는데, 『남제서』는 백제가 남제에 보낸 외교문서를 토대로 백제왕의 이름은 물론 전쟁에서 공을 세운 백제의 장수들 이름까지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대한민국의 강단유사사학계가 만든 한국사 데이터베이스는 『삼국사기』의 488년 백제와 위의 전쟁기사를 고구려와 백제의 전쟁을 잘못 기록한 것으로 사기치고 있다. 그 근거는 『南齊書』에 나오는 ‘흉리(匈梨)’ 또는 ‘험윤(??)’이 고구려의 멸칭이라는 것이다. 흉리와 험윤은 백제가 490년 위를 물리쳤다는 내용의 남제에 보낸 외교문서에 나오는 말이며, 『남제서』는 490년 魏虜(위 오랑캐)가 백제를 공격하여 패했다고 명백히 기록하고 있다. 『자치통감』을 포함하여 무려 5개의 중국 사서가 위가 백제를 침공하였다고 명시하고 있다. 즉 그들은 근거 같지도 않은 것을 근거로 『삼국사기』를 부인하고 있다. 그들은 중국 사서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있다.
『수서(隋書)』는 남북으로는 1,000여 리이고 동서로는 수백리이며, 노루와 사슴이 토산물인 타모라국이 百濟에 부용(附庸)되어 있다고 하는데, 대만의 남북 직선거리가 965리(386㎞)에 이르며 동서 폭은 360여 리(144㎞)이며 현재도 녹항(鹿港) 즉 사슴항이라 일컫는 항구도시가 있을 정도이므로 대만은 백제의 영토였다. 그러나 강단유사사학계는 타모라국을 제주도라고 억지를 쓴다.
『괄지지』에 “백제국 서남 발해 중에 큰섬 15개가 있는데 모두 읍락이 있고 사람이 거주한다. 백제에 속한다.”라고 요동반도백제가 기술되어 있다. 발해 중에 서남쪽에 큰 섬이 있는 곳은 요동반도밖에 없다. 『구당서』 『신당서』 『통전』 『삼국사기』에 백제 땅을 신라와 대진(소위 발해)이 나누어 가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요동반도가 백제 땅이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런데 강단유사사학계는 요동지역으로 옮겨진 웅진도독부를 대진이 차지하여 『구당서』 『신당서』 『통전』 『삼국사기』가 헛소리를 하였다고 주장한다. 『괄지지』는 638년부터 642년까지 편찬된 책으로 현재 전하지는 않지만, 위 『괄지지』의 기사를 인용한 장수절의 『사기정의』가 『사기』의 3가주석으로 인정 받는 권위 있는 사서이고 736년에 저작된 만큼 『사기정의』가 인용한 『괄지지』의 백제 영토 기사는 부인하기 거의 불가능한 자료이다. 강단유사사학계는 8세기에 살았던 장수절이 백제가 존재하고 있었던 때 기록한 지리지를 인용한 것을 부인하는 놀라운 투혼을 발휘한다. 『괄지지』의 위 기사에 의해 신라가 고구려를 멸하고 차지한 영토가 대동강 원산만이라는 일제의 날조는 누가 보더라도 소설이 된다. 강단유사사학계는 아직도 대동강 원산만 교시를 추종하고 있다.
2019년 3차원 스캐닝으로 충주고구려비 전면 상단의 글자가 ‘永樂七年歲在丁酉’ 즉 397년으로 판독되었다. 그런데 강단유사사학계는 397년이 그들의 장수왕 남하설과 부합하지 않으며 신라가 고구려의 속민이었다는 광개토대왕릉비문의 사실성을 입증하므로, 충주고구려비의 과학적 판독결과조차 부정하고 있다. 그들은 사료에 의해 역사를 기술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소설에 의해 사료를 조작하려고 한다.
덕흥리고분 벽에 유주자사 소속의 13개 군 태수들이 유주자사인 진(鎭)을 알현하는 내조도(來朝圖)가 그려져 있고 13군의 이름이 쓰여있다. 주 치소가 낙양에서 2,300리라는 문구가 있으므로 당시 13개 군은 하북성 중부로 추정되며, 通事吏라 표기된 통역관이 그려져 있어 내조도의 내용은 고구려가 407년 후연을 정복하고 유주를 고구려 영토로 하면서 임명한 초대 유주자사 진이 현지인 태수를 지휘하는 상황임을 알 수 있다. 강단유사사학계는 鎭이 후연의 유주자사였다고 주장하기도 하나, 영락이라는 고구려 연호로 날자를 표시하였으며, 진이 국소대형이라는 고구려의 것이 분명한 관직을 역임했고, 통역관이 그려져 있다는 점에서 그들의 거짓말은 소설에 불과하다. 강단유사사학계는 鎭의 관작이 허구였고 내조도(來朝圖)도 鎭의 상상이나 희망사항이라 주장하기도 하나, 그들의 주장이 전혀 근거없는 허구일 뿐이다.
동수묘(안악 3호분) 묵서명에 동수(冬壽)가 영화 13년 10월에 사망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강단유사사학계는 336년 전연의 모용황에게 반란하였다가 실패하여 고구려에 망명한 ?壽라 하면서 영화를 동진의 연호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동진의 영화 연호는 12년까지밖에 사용되지 않았다. 고구려는 북조의 연호도 사용하지 않았으므로 남조의 연호를 사용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또한 당시에는 3년상이 보편적이므로 무덤을 닫는 시기는 빨라야 영화 13년 10월에서 1년 2개월이 지난 영화 15년이 된다. 영화가 동진의 연호라면 연호가 바뀐 후 최소한 만 2년이 넘게 연호가 바뀐 줄 몰랐어야 하는데, 당시에 장례가 가지는 의미와, 그 정도 무덤을 축조할 정도의 권력을 가진 후손임을 고려하면 무덤 축조자들이 연호 변경을 몰랐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동수묘 묵서명에 永和十三年十月戊子朔이라 되어 있고, 481년 10월 1일이 戊子일이므로 영화 13년은 481년이다. 따라서 영화는 장수왕이 469년부터 사용한 연호임을 알 수 있다. 묵서명에 의하면 동수는 유주지역의 여러 군에서 태수로 근무하다가 481년 관직 수행 중 사망하였는데, 동성왕의 유주 침공 때 전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동성왕이 고구려의 유주를 차지하자 위가 백제를 공격했다고 추정할 수 있다.
「문무대왕릉비문」과 「대당고김씨부인묘명」은 투후 김일제를 신라김씨의 중시조로 명시하고 있다. 新나라에서 만든 新錢은 新이 20년도 존속하지 못했고, 건국 이후에도 잇달아 반란이 일어나는 등 국가 정세가 매우 혼란했음에도, 김해를 중심으로, 중국에서 700년간 사용된 오수전보다 더 많이 확인된다. 이는 왕망을 중심으로 김씨들이 新을 건국하였다가 新이 무너지자 김수로와 김알지가 한반도로 오면서 많은 양의 新錢을 가지고 왔기 때문이라 보아야 한다. 김수로가 新이 망할 때 왔으므로 가야가 42년에 건국되었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강단유사사학계는 옛 사람들이 직접 자신의 조상에 대해 기록한 「문무대왕릉비문」과 「대당고김씨부인묘명」의 내용을 아무 근거도 없이 부정하여 김수로와 김알지가 김일제의 후손임을 부정하며, 가야의 42년 건국도 허구라고 주장한다.
강단유사사학계는 객관적이고 확실한 증거가 있는 우리 역사는 부정하나, 실체가 없는 야마토왜와, 야마토왜의 한반도 진출에 대해서는 매우 적극적으로 긍정한다. 「일본서기」에 倭나 大倭(大和)는 일본의 속국으로 기술되어 있고, 대왜가 야마토로 발음될 수도 없다. 예군 묘지명에서 일본은 백제를 의미하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일본서기」의 일본은 백제이지 일본의 속국으로 기술된 大倭(大和)가 될 수 없다. 「일본서기」는 백제가 열도를 지방행정구역으로 지배하다가, 백제가 망하자, 백제의 별칭인 ‘일본’으로 독립하면서 열도인을 다스릴 목적으로 가공의 역사를 기술한 책으로 용비어천가와 같은 문학서이다. 열도에 왜계의 야마토 정권이 성립한 적이 없다. 『삼국지』와 『후한서』에 나오는 야마일(邪馬壹) 또는 야마대(邪馬臺)국은 가야계의 나라로 왜가 아니다. 설사 야마대가 왜계의 나라라 하더라도 일본의 속국이므로 야마토왜왕이 일본의 왕이 될 수는 없다.
강단유사사학계는 가공의 야마토왜가 4세기 이후 한반도 남부에 군사적 경제적으로 강력한 영향력을 끼쳤다고 한다. 그 근거는 「일본서기」의 임나가 가야를 말하므로 「일본서기」의 내용이 한반도 남부에 관한 이야기라는 것이다. 그들은 아무 근거도 없이 임나를 가야라고 한다. 그들 중 가야 전문가로 치부되는 김태식은 임나가 가야인 이유를 ‘무슨 이유에선가’라고 한다. 이영식은 「일본서기」를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며 임나가 가야라고 한다. 그런데 「일본서기」를 있는 그대로 볼수록 임나는 가야가 아니다.
「일본서기」에 “탁순에 집결하여 신라를 공격하여 깨뜨렸다. 그리하여 비자발, 남가라, 탁국, 안라, 다라, 탁순, 가라 7국을 평정하였다.”는 문구가 있다. 그들은 이 7국을 신라가 아니라 임나라고 하여 문언을 무시한다. 그들에 의하면 이들 7국은 임나 즉 가야의 영역인데, 이들 7국의 영역이 모두 신라에 속했던 시기는 없다. 특히 강단유사사학은 남가라를 김해라고 주장하는데, 김해가 신라의 영역이었던 시기는 있을 수가 없다. 따라서 「일본서기」 7국을 문자 그대로 신라7국으로 해석하면 「일본서기」의 임나와 신라를 한반도 남부의 신라와 가야로 보는 것은 불가능하고 「일본서기」의 모든 이야기들도 열도에 관한 이야기가 되며 임나는 가야와 같은 말일 수가 없게 된다. 그래서 조선총독부는 신라7국을 임나7국으로 강변하였다. 또 「일본서기」 임나 10국 중에 가라 안라 다라가 있다. 그들의 「일본서기」 시기 설정방법(「일본서기」는 역사서의 기본인 시기가 사실과 달라 일제와 강단의 유사사학자들이 사용하는 시기 설정방법이 있다)에 의하면 신라7국은 369년의 일이고 임나10국은 562년의 일이다. 그들의 시기 설정을 존중하면 가라 안라 다라가 신라였다가 임나로 되었다는 것인데, 한반도의 신라에는 가라 안라 다라가 있지도 않았고, 신라가 그 세 지역을 가야에 뺏긴 적도 없으므로, 「일본서기」의 7국이나 10국은 신라인들과 가야인들이 이주한 열도 내 마을국가들의 이름으로 보아야만 한다. 이러한 결론을 방지하기 위해 강단유사사학계는 신라7국을 임나7국이라 강변한다. 그들의 「일본서기」 문언 파괴는 신라7국만이 아니다. 문구는 일본왕이 7국을 공격하여 깨트렸다고 하는데, 김태식은 주체를 일본왕도 아니고 야마토왜왕도 아닌 야마토왜에 충성하는 백제로 바꾸고, 공격하여 깨트린 것도 교역권의 장악이나 공납관계의 형성으로 바꾼다. 김태식은 전혀 「일본서기」의 문언을 존중하지 않으며 그의 소설을 창작할 뿐이다. 그래도 이영식은 김태식을 존중한다. 이영식의 ‘문언 그대로’는 아무 이유 없이 임나가 가야로 되는 문언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일본서기」는 “任那者去筑紫國, 二千餘里. 北阻海以在鷄林之西南(임나는 축자국에서 2천여리 가는데, 북쪽은 바다로 막혀 있고 계림의 서남쪽에 있다)”라고 임나의 위치를 규정하고 있다. 가야의 북쪽은 바다가 아니다. 강단유사사학자들은 이 문구를 어떻게든 회피하기 위해 오역을 하거나 오자라고 주장하거나, 심지어는 낙동강이 바다였다고까지 주장한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가야가 망한 후에도 약 100년간 임나가 수시로 등장한다. 따라서 「일본서기」에 의하면 임나는 결코 가야가 될 수 없다.
강단유사사학계는 야마토임나설을 위해 창녕비의 내용도 조작한다. 처음부터 신라의 영토였던 창녕을 임나였다고 날조하기 위해, 561년 만들어진 창녕비가 척경비(拓境碑)나 순수관경비(巡狩管境碑)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창녕비문은 농토 산림 소금 하천 등 경제 관련 업무의 주관기관을 정하는 것이고, 순수관경이나 척경에 관련된 문언은 전혀 없다. 가야는 557년 신라에 정복 당하여 561년에는 가야가 있지도 않은데, 강단유사사학계는 비문의 내용과 아무 관계도 없는 국경을 날조하면서 임나가 가야라고 한다.
일제총독부 역사 날조의 핵심은 야마토왜가 한반도 남부에 진출하였다는 야마토임나설이 아니라 일본 즉 열도백제를 야마토왜로 변조한 것이다. 일본이 야마토왜라는 것은 전혀 근거가 없으므로, 야마토임나라는 더 큰 날조를 통해 이를 덮으려 하였다. 즉 야마토임나설은 야마토왜의 가공성을 방어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대마도를 반환하지 않기 위해 독도를 문제삼는 것처럼, 야마토왜의 날조를 숨기기 위해, 일제총독부는 야마토왜의 한반도진출이라는 더 큰 날조를 실행하였다.
강단유사사학의 주장은 대부분 사기이다. 낙랑군이 평양이었다는 것은 이어지는 역사와 부합하지 않는다. 그래서 사기꾼들은 고구려가 4세기 전반기에 400여년간 지속적으로 중국 영토였던 평양의 낙랑군과 황해도의 대방군을 탈취하였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주장엔 사료상 근거가 전혀 없다. 또 4세기 전반기는 고구려가 가장 약화된 시기로서 사실상 전연에 복속된 상황이고, 漢 조위 서진보다 전연의 중심지가 낙랑군에서 훨씬 가깝다는 점에서 4세기 전반 고구려의 중국 영토 탈취는 전혀 개연성이 없는 사건이다. 설사 서진 말 혼란기를 틈타 그렇게 하였더라도 전연이 자기들 땅이었다고 바로 뺏어갔을 상황이다. 전한 후한 사이의 혼란기, 후한 말 삼국의 혼란기에도 중국 왕조의 땅으로 유지되었던 낙랑군을 고구려를 거의 속국이다시피 만든 전연이 유지하지 못하였다는 것은 개돼지도 속아 넘어가지 않을 거짓말이다. 사기꾼들은 사기를 치기 위해 고구려의 영토 확장이라는 말을 하지 못한다. 그들이 한국의 역사학자라면 당연히 ‘고구려의 영토 확장’이라 해야 한다. ‘낙랑군 교치’라는 말은 중국 역사학자가 해야 하는 말이다. 그들이 ‘고구려의 대동강 이남과 황해도 영토화’라고 말하지 못하는 이유는 거짓말을 해야하기 때문이다. 본질을 가리는 ‘낙랑군 교치’라는 이상한 말을 해야 그들의 거짓말이 조금이라도 드러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소위 낙랑군 교치설은 낙랑군 평양설을 지키기 위한, 더욱 치졸한 거짓말에 불과하다.
이상은 강단유사사학계가 날조한 우리 역사의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이상의 언급만으로도 우리 역사가 불순한 목적을 가진 소설가들에 의해 사실과 다르게 창작되고 있음을 확신할 수 있을 것이다. 사료에 의해 실증적 과학적으로 우리 역사를 회복하는 것은 매우 시급한 일이다. 이 책은 필자의 2022년 순천향대학교 석사논문(한민족의 이동과 역사강역에 관한 연구)을 일부 수정보완한 글이다. 이 글은 쉽게 읽히도록 쓴 글이 아니다. 강단유사사학계의 거짓을 입증하고 우리 상고사를 실증적 과학적으로 기술하기 위해 논문 형식의 글을 그대로 출판하고자 한다.
조선의 역사설화(소위 단군신화)가 구체적으로 기재된 사서는 辰韓의 영토를 계승한 고구려에서 보관하고 있었을 것이다. 대진(소위 발해)의 멸망으로 고구려와 대진에서 보관되던 상고사 서적이 사라진 후, 우리는 역사를 잃어버렸다. 이 글은 우리 역사상 최초로 상실된 우리 역사를 회복하였다. 신채호 등 독립투사들이 우리 역사를 복원하기 위해 노력하였지만, 연구 여건이 열악하여 우리 상고사를 회복하지는 못하였다. 광복 이후 독립투사들의 업적을 이어받아 우리 역사를 과학적으로 기술하여야 하였지만, 일제잔재가 그대로 남아 날조된 역사가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 강단유사사학에 대항하여 재야에서 우리 역사를 찾기 위한 연구가 지속되었지만, 단편적인 성과에 그쳐 우리 상고사를 회복하는 단계에 이르지는 못하였다. 필자는 재야의 실증적 연구성과를 토대로 하면서, 그동안 잊혀졌던 韓을 발견하여 우리 상고사의 대강을 회복하였다. 이 글은 한민족 최초의 과학적 상고사로서 우리의 상고사의 대강을 한민족 역사상 최초로 복원한 책이다.
이 글을 통해 우리 역사 연구는 이제 본궤도에 오르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모호했던 우리 역사의 흐름과 강역이 명확해졌기 때문이다. 조상을 잃어버린 사람은 자존감을 가질 수 없다. 열도인은 우리의 형제로 우리와 조상이 같다. 일제는 스스로 조상을 부인하였기 때문에 반인륜적 전쟁범죄자가 되었다. 우리 사회와 정치의 저질성은 조상을 모르고 일제의 의도대로 조상을 비하하는 데서 비롯되는 문제이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이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살아온 이야기를 알아서 자신의 정체성을 회복하기를 바라 마지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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