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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 강단유사사학자는 선화공주가 무왕의 비가 아니었다고 주장한다. (삼국유사의 기록은 설화이므로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그 근거가 가관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사택왕후 설명
“익산 미륵사지 서탑 심주석에서 발견된 금제사리봉안기에 의하면, 사택왕후는 재물을 희사하여 미륵사를 창건하였고, 639년(무왕 40)에 사리를 안치하였다고 한다. 이를 통해 639년에 미륵사를 창건한 무왕의 비는 신라의 선화공주(善花公主)가 아니었다는 점이 입증되었다.”
무왕은 641년 재위 42년에 사망하였다. 639년 당시 사택왕후가 무왕의 비라고 선화공주가 무왕의 비가 아니었다고 할 수 있는가? 입증이란 말을 이렇게 쉽게 하는 그들의 뇌는 어떤 구조로 되어 있을지 궁금할 뿐이다. 당시 왕비가 한 명이라는 법도 없고, 왕비가 한 명이더라도 선화공주가 639년 이전에 사망하였으면 (무왕의 639년 당시 나이를 알 수 없으나, 재위 40년째이므로 상당한 고령이었을 것이다) 사택왕비가 다음 왕비가 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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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륵사는 3탑 3금당의 독특한 구조로 되어 있어, 서탑의 사리봉안기에 사택왕후가 창건하였다는 말이 있어도 미륵사 전체를 창건하였다는 말이 될 수는 없다.
어떻게든 핑계만 생기면 삼국사나 삼국유사를 쓰레기로 만들고야 말겠다는 그들의 다짐이 없다면 이렇게 쉽게 선화공주를 부인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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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동아일보 기사이다.
https://www.donga.com/news/Culture/article/all/20191205/98676351/1
학계 일각에서는 명문을 근거로 ‘선화공주의 발원으로 무왕이 미륵사를 창건했다’는 삼국유사 기록은 잘못이며, 선화공주는 설화 속 가공의 인물이라는 주장이 제기됐습니다. 그러나 선화공주 실존론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미륵사가 ‘3탑 3금당’의 독특한 구조를 가진 사찰이었다는 점에 주목합니다. 현재 흔적만 남아 있는 중앙 목탑 터에 선화공주의 사리봉영기가 따로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입니다. 이와 관련해 조선시대와 달리 주자성리학의 영향을 받지 않은 고대사회에서는 왕이 정비(正妃)를 여러 명 거느렸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선화공주가 실존했으며 무왕과 나란히 익산 쌍릉(雙陵)에 묻혀 있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유물이 발견됐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2015년 국립중앙박물관은 출처가 알려지지 않은 금동 유물을 보존처리하는 과정에서 이것이 익산 쌍릉의 하나인 소왕묘(왕비가 묻힌, 상대적으로 작은 규모의 왕릉)에서 출토된 ‘금동 밑동쇠’(金銅製座金具·목관 뚜껑과 측판에 붙는 널꾸미개를 고정시켜 주는 장신구)라는 사실을 밝혀냈습니다. 일제강점기 촬영한 유리건판 사진과 당시 작성된 유물 목록을 확인한 결과였습니다.
이병호 현 국립중앙박물관 전시과장은 이 밑동쇠와 딱 들어맞는 소왕묘 출토 ‘금동 널꾸미개’(金銅製棺裝飾·목관의 뚜껑과 측판을 연결해주는 장신구)를 찾아냈으며, 이것이 무왕이 묻힌 대왕묘의 널꾸미개에 비해 문양과 제작기법에서 시기적으로 더 앞선다는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왕비가 묻힌 소왕묘가 무왕의 대왕묘보다 먼저 만들어졌다는 뜻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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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국사편찬위원회 삼국사기 왕흥사 관련 주석이다.
https://db.history.go.kr/ancient/level.do?levelId=sg_027r_0050_0440
한편 『三國遺事』 권2 紀異2 武王條와 권3 興法3 法王禁殺條에 나오는 ‘왕흥사를 미륵사라고도 한다’는 기록에 의거하여 본 기사의 왕흥사를 미륵사와 동일한 것으로 보면서 본서에 기록된 634년 왕흥사[미륵사]의 완성은 중원(中院)이 완성된 것을 기록한 것이고 「익산 미륵사지 서탑 출토 금제사리봉안기(益山 彌勒寺址 西塔 出土 金製舍利奉安記)」의 639년은 서탑이 완성된 것을 보여주는 것이며, 동원의 경우 640년 이후 완성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한 견해도 있다(최연식, 2012, 3~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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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답은 없음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한반도 고대사는 몇백년 이상이 지난 후손들이 적은 기록일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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