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동은 어머니의 신분이 낮은 혼외 왕족이다. 서동은 익산에서 마를 캐다 사금을 발견하여 부를 축적하였다. 부자가 되었지만 어머니의 신분으로 인해 서동은 백제의 귀족과 혼인할 수 없었다. 그래서 서동은 신분세탁을 위해 신라의 공주와 혼인하려 하였고 이왕이면 백제에까지 미인으로 소문 난 선화공주로 결정하였다. 서동은 한편으론 진평왕에게 막대한 금을 선물하였고, 한편으론 선화공주에 대한 헛소문을 퍼뜨렸다.
선화공주와 혼인한 후 부를 잘 활용하여 귀족들의 인심을 얻었고, 혜왕 법왕이 연이어 재위 2년만에 사망한 상태에서, 왕위를 승계받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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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동설화의 기록화 양상 연구
변종현 ( Jong Hyun Byun )
배달말학회 2010.12 배달말 47권 1-27(27pages)
<삼국유사> 무왕조의 기록에서 무왕이 미륵사를 창건했다는 것은 역사 기록에서도 입증이 되고, 미륵사터를 발굴하는 과정에서 미륵사터가 습지였다는 것도 확인이 되었다. 그리고 서동이 마를 캐던 곳에 황금이 흙더미처럼 쌓여있다는 것도 역사적 사실에 가까운 기록이라 여겨진다. 즉, 익산과 인접한 김제시 금구면 오봉리는 채금하던 곳이 수십 곳이 남아있고, 지금도 금구면에서는 겨울철에 沙金을 채취하고 있다. 師子寺에 거주했다는 知命法師는 서동설화에서 주요한 인물로 등장하는데, 현재 미륵산(용화산) 정상 밑에 있는 獅子菴을 발굴 조사하는 과정에서 지명법사가 거주했다는 師子寺와 같은 절임이 확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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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편찬 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삼국유사』 번역
무왕(武王)[고본(古本)에는 무강(武康)이라고 했으나 잘못이다. 백제에는 무강이 없다.]
제30대 무왕(武王)의 이름은 장(璋)이다. 그 어머니가 과부가 되어 서울 남쪽 못 가에 집을 짓고 살고 있었는데 못의 용(龍)과 관계하여 [장을] 낳고 어릴 때 이름을 서동(薯童)이라고 하였다. 재기와 도량이 커서 헤아리기 어려웠다. 항상 마를 캐어 팔아서 생업(生業)을 삼았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그 때문에 서동이라고 이름하였다.
신라 진평왕(眞平王)의 셋째공주 선화(善花)혹은 선화(善化)가 아름답기 짝이 없다는 말을 듣고 머리를 깎고 [신라의] 서울로 갔다. 마를 동네 아이들에게 먹이니 아이들이 친해져 그를 따르게 되었다. 이에 노래를 지어 여러 아이들을 꾀어서 부르게 하니 그것은 이러하다.
선화공주님은
남몰래 사귀어 두고
서동방을 밤에 몰래 안고 간다.
동요가 서울에 가득 퍼져서 대궐 안에까지 들리자 백관(百官)들이 임금에게 극력 간하여 공주를 먼 곳으로 귀양보내게 했다. 장차 떠나려 하는 데 왕후(王后)는 순금 한 말을 주어 노자로 쓰게 했다. 공주가 장차 귀양지에 도착하려는데 서동이 도중에 나와 절하면서 장차 모시고 가겠다고 했다. 공주는 비록 그가 어디서 왔는지는 알지 못했지만 우연히 믿고 좋아했다. 이로 말미암아 서동을 따라가면서 몰래 정을 통하였다. 그런 뒤에야 서동의 이름을 알았고, 동요의 영험을 믿었다.
함께 백제에 이르러 모후(母后)가 준 금을 내어 장차 살아 나갈 계획을 의논하니 서동이 크게 웃고 말했다. “이것이 도대체 무엇이오?” 공주가 말하기를, “이것은 황금이니 백년의 부를 누릴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서동이 말하기를, “나는 어릴 때부터 마를 캐던 곳에 황금을 흙처럼 많이 쌓아 두었소”라고 하였다. 공주는 이 말을 듣고 크게 놀라면서 말했다. “이것은 천하의 지극한 보물입니다. 그대가 지금 그 금이 있는 곳을 아시면 부모님이 계신 궁전으로 보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서동은 “좋다.”고 말하였다. 이에 금을 모아 언덕과 같이 쌓아 놓고, 용화산(龍華山) 사자사(師子寺)의 지명법사(知命法師)에게 가서 금을 실어 보낼 방법을 물으니 법사가 말하기를 “내가 신통한 힘으로 보낼 터이니 금을 이리로 가져 오시오”라고 하였다. 공주는 편지를 써서 금과 함께 사자사 앞에 가져다 놓았다. 법사는 신통한 힘으로 하룻밤 사이에 신라 궁중으로 보내어 두었다. 진평왕은 그 신비스러운 변화를 이상히 여겨 더욱 서동을 존경해서 항상 편지를 보내어 안부를 물었다. 서동은 이로부터 인심을 얻어서 왕위에 올랐다.
어느 날 무왕이 부인과 함께 사자사에 가려고 용화산 밑의 큰 못가에 이르니 미륵삼존(彌勒三尊)이 못 가운데서 나타나므로 수레를 멈추고 절을 올렸다. 부인이 왕에게 말하기를 “모름지기 이곳에 큰 절을 지어 주십시오. 그것이 제 소원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은 그것을 허락했다. 지명법사에게 가서 못을 메울 일을 물으니 신비스러운 힘으로 하룻밤 사이에 산을 무너뜨려 못을 메우고 평지를 만들었다. 이에 미륵삼회(彌勒三會)의 모습을 본따 전(殿)과 탑(塔)과 낭무(廊?)를 각각 세 곳에 세우고, 절 이름을 미륵사(彌勒寺) [≪국사(國史)≫에서는 왕흥사(王興寺)라고 했다]라고 하였다. 진평왕이 여러 공인(工人)들을 보내서 이를 도왔는데 그 절은 지금도 남아 있다.[≪삼국사(三國史)≫에는 이를 법왕 (法王)의 아들이라고 했는데, 여기에서는 과부의 아들이라고 했으니 자세히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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