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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왕은 사택씨 등 부여의 귀족 세력 영향력을 축소시키기 위해 자신의 근거지였던 익산으로 천도하였다. 「관세음응험기」에 무왕이 지모밀지로 천도하고 제석사를 신설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익산의 왕성과 제석사 유적, 제석사 명문 기와가 「관세음응험기」의 내용을 증명한다. 익산 쌍릉 중 대릉은 매장된 인골 분석상 무왕릉으로 추정된다. 『삼국사』는 무왕 시, 사비와 왕도를 구별하고 있어, 왕도는 익산임을 알 수 있다.
의자왕은 무왕의 맏아들임에도 무왕 33년 즉 632년에야 비로소 태자로 책봉된다. 이는 의자왕의 어머니가 백제의 귀족이 아니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무왕 사후 백제는 다시 사비로 천도하였을 것이다. 『삼국사』는 의자왕 시 사비가 왕도임을 명시하고 있다.
백제의 주된 왕도였던 서도 한성과, 서도 한성 남쪽의 웅진은, 韓 지역에 많은 퇴적이 있었기 때문에, 아직 땅 밑에서 잠자고 있을 것이다. 본고의 타당성은 韓 지역의 백제 유적과 유물의 발견에 의해 명확히 입증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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