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생자 중에는 억만장자 아스테드, 저명 신문가 헴스테드, 육군 소령 바트, 저명 엔지니어 루오부어 등 사회의 저명인사가 많았지만, 이들 모두 곁에 있던 가난한 농촌 부녀들에게 자리를 양보했다. 타이타닉호의 주요 승무원 50여 명 중 구조를 책임졌던 래히틀러 외 전부 자리를 양보하고 배와 함께 생을 마감했다. 새벽 2시, 각자 도망가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1번 전산사 존 필립스는 여전히 전산실에 앉아 마지막 순간까지 ‘SOS’를 입력하며 자신의 보직을 떠나지 않았다.
선미가 물에 가라앉기 시작했을 때, 삶과 죽음의 마지막 순간, 사람들이 서로에게 외쳤다. ‘당신을 사랑해요! 당신을 사랑해요!’
그러나 예외도 있었다. 일본 철도원 차장인 호소 노텍스트 씨는 여장을 한 채 여성과 어린이들로 채워진 10번 구명정에 올랐다. 그는 귀국 후 바로 퇴직당했다. 모든 일본 신문사와 여론은 그를 공개적으로 비난했으며 십여 년 뒤 후회와 수치로 가득 찬 삶을 마감했다.
타이타닉호를 건조한 선박회사 화이트 스타 라인은 1912년 참사를 회고하는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남성들의 희생을 요구하는 해상 규칙은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단지 그들의 행동은 약자들에 대한 배려이자, 그들의 개인적인 선택이었습니다.”
한일전 잘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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