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9월 19일, 국가인권위원회는 1992년에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법정투쟁을 개시해 2018년 11월 29일 대법원 승소 판결을 받아내 역사 청산에 기여한 양금덕 할머니를 대한민국 인권상(국민훈장 모란장) 수상자로 공표했다.
예정대로라면 작년 12월 8일 국무회의 심의를 거친 뒤 다음 날 훈장이 수여됐어야 한다. 하지만 외교부가 제동을 걸어 무산시켰다. 한일관계를 중시하는 윤 정부 입장에서는, '반일투사'에 대한 서훈이 일본에 어떻게 비칠지 고심했을 법하다.
▲ 양금덕 할머니에 대한 대한민국 인권상, 국민훈장 서훈 수상이 무산된 것에 반발해 (사)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이 2022년 12월 19일 광주시의회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정부를 성토하고 있다. ⓒ 사단법인 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
그랬던 외교부가 이달 24일 새로운 입장을 내놓았다. 보도에 따르면, 이날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전체회의에서 박진 외교부 장관은 서훈을 재개할 가능성이 있느냐는 질문에 긍정적 답변을 내놓았다. "실무적으로 논의했고 의견을 수렴하고 있다고 보고받았다"라며 "가능한 한 협의해서 결론 내는 것이 필요하겠다고 얘기했다"라는 사실을 밝혔다.
뒤이어 "진정성을 가지고 존중하는 마음으로 피해자들의 의견을 경청하고 있다"라며 "서훈 문제도 그런 각도에서 바라보고 있다"고 덧붙였다. 작년과 달리 이번에는 피해자들을 위한 각도에서 바라보겠다고 했으니, 서훈 재개의 가능성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제라도 양금덕 할머니에게 훈장이 수여되는 것은 당연하고 바람직하다. 동시에, 양 할머니가 지금처럼 '미쓰비시로부터 직접 배상받겠다'는 입장을 계속 유지할 경우에도 윤 정부가 훈장을 수여할지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서훈 재개가 소송 포기를 유도하는 수단이 될 가능성도 없지 않기 때문이다.
20% 요구, 약정 내용 살펴 보니
한편, 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이 피해자 유족에게 수령액 20%를 요구했다는 24일 자 <조선일보> 보도는 많은 국민들을 놀라게 할 만했다. 한국 정부가 배상책임을 떠안는 제3자 변제에 반대했던 이 시민단체가 제3자 변제를 받은 유족에게 금전 지급을 요구했다는 보도다.
<조선일보>는 "해당 단체는 윤석열 정부의 제3자 변제 해법을 반대해왔지만, 일부 피해자 유족이 최근 이를 수용해 2억 원이 넘는 판결금을 수령하자, 약정서를 근거로 돈을 내라는 내용증명까지 보냈다"라고 보도했다.
그런 뒤 "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의 감사인 김 모 변호사는 이달 1일 판결금을 수령한 한 피해자 유족들에게 약정금 지급요청 공문을 보내 '수령한 2억 5631만 3458원 중 20%인 5126만 2692원을 시민모임에 보수로 지급하셔야 한다'며 '많은 협조를 부탁드린다'고 했다"라고 전했다. 그러면서 김 변호사가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출신이며 위 시민모임의 전신인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공동대표였다고 소개했다.
<조선일보>는 2012년 10월에 작성된 약정서의 조항을 인용했다. "이 사건과 관련해 손해배상금·위자료·합의금 등 그 명칭을 불문하고 피고(일본 기업)로부터 실제 지급받은 돈 중 20%를 모임에 교부한다"라는 조항이 있다고 보도했다.
그러면서, 내용증명 최고장을 받은 유족의 입장을 외교 소식통의 입을 빌려 보도했다. "외교 소식통은 '일부 유족은 피해자가 생전에 체결한 약정서의 존재를 수령 후에야 안내를 받아 지급에 난색을 표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했다"라고 전했다.
<조선일보> 보도가 나온 뒤 시민단체에 대한 비판이 쏟아져나왔다. 일부 언론매체들은 '좌파 시민단체, 강제징용 판결금 20% 요구 논란', '징용 배상금 20% 달라 전화하고 집까지 찾아와' 등등의 기사를 내보냈다.
▲ 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이 피해자 유족에게 수령액 20%를 요구했다는 24일 자 <조선일보> 보도 ⓒ 조선일보
여당도 비판을 쏟아냈다. 전주혜 국민의힘 대변인은 "겉으로는 강제징용 피해자의 한 맺힌 사연을 들어주는 척하면서 뒤로는 사리사욕을 챙긴 것"이라고 논평했다. 25일 자 <조선일보> 보도에 따르면, 박수영 국민의힘 여의도연구원장은 시민모임을 '반일 브로커'로 폄하하며 "이들은 한일관계가 개선되면 자신들의 밥벌이가 없어진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라고 비난했다.
최재형 국민의힘 의원은 24일 페이스북 글에서 "시민단체가 강제징용 피해자를 지원하는 것이 아니라 시민단체가 지원을 구실로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피눈물 나는 고통의 대가를 먹고 살겠다고 나서는 것에 다름 아닙니다"라고 한 뒤 "소송 지원과 약정금 사이에 대가관계가 있다고 보이기도 합니다"라며 "그렇다면 변호사법을 위반한 약정이어서 무효일 가능성도 있습니다"라고 주장했다.
언론에 보도된 실제 약정서의 사본에는 당사자 셋이 등장한다. 양금덕 할머니가 포함된 5인의 피해자(위임인), 변호인으로 구성된 소송대리인(수임인), 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의 전신인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이다. 이 3자는 약정서 제1항에서 이렇게 합의했다.
위임인들은 위 사건과 관련하여 손해배상금·위자료·합의금 등 그 명칭을 불문하고 피고로부터 실제로 지급받은 돈 중 20%에 해당하는 금액을 '일제피해자 인권지원 사업, 역사적 기념사업 및 관련 공익사업'을 위해 사용할 수 있도록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에게 교부한다.
제1항에 따르면, 전범기업으로부터 직접 받은 것뿐 아니라 한국 정부의 제3자 변제에 의해 받은 것도 20%에 포함된다. 이 조항은 20%의 사용 용도를 공익적 목적으로 제한했다.
이와 관련해 제3항은 "위임인들로부터 지급받은 돈을 위 1항에서 정한 대로 사용하여야 하고, 위임인들이 생존해 있는 동안 매년 1회 그 구체적인 사용 내역을 위임인들에게 통지하여야 한다"라는 의무를 시민모임에 부여했다.
<조선일보>는 약정서 내용을 소개할 때 "이 사건과 관련해 손해배상금·위자료·합의금 등 그 명칭을 불문하고 피고(일본 기업)로부터 실제 지급받은 돈 중 20%를 모임에 교부한다"라는 조항이 있다고 보도했다. "실제 지급받은 돈 중 20%"라는 구절과 "모임에 교부한다"라는 구절 사이에 공익적 용도 제한에 관한 부분이 있다는 것을 생략했던 것이다. 직접 인용을 하는 듯이 하면서 내용 일부를 뺐으니, 악의성이 있는 보도라고 할 수 있다.
최재형 의원은 "약정서에 따르면 약정금은 일제 피해자 인권지원 사업, 역사적 기념사업 및 관련 공익사업을 위해 사용한다고 하지만, 결국은 대부분 시민단체의 운영비로 사용될 것입니다"라고 단정했다. 하지만, 그렇게 될지 안 될지는 확단할 수 없다. 현재로서는 약정서만 갖고 판단할 수밖에 없다. 20%가 시민모임에 사적으로 지급되는 돈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성급하다.
당사자들이 위와 같은 합의를 한 것 자체를 법적·도덕적으로 나무라기는 쉽지 않다. 승소한 판결금의 일부를 역사문제 해결에 사용하기로 한 것을 나쁜 일이라고 판단하기는 힘들다.
피해자와 소송대리인단·지원단체 갈라치기
<조선일보> 보도가 나온 뒤, 시민모임은 피해자뿐 아니라 소송대리인단과 지원단체도 소송을 위해 희생을 감수했다는 점을 24일 자 보도자료에서 언급했다. "2012년 10월 소송을 시작할 무렵, 소송대리인단(대표 이상갑)은 공익 소송을 위한 재능 기부를 하고, (사)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의 전신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대표 김희용)은 시민단체로서 제반 지원하는 활동을 하고, 원고(근로정신대 피해자들)들은 법정에 나서서 역사적 증언을 해주시기로 의기 투합하여 소송을 시작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소송에서 이길지 질지 또 소송 기간이 얼마나 될지 알 수 없지만, 만약 소송에 승소하여 경제적인 이득이 생기면 원고들은 그중 20%를 강제동원 피해자 문제 등 역사 계승 활동을 위한 공익 목적으로 활용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에 합의했습니다"라며 "소송의 시작이 그러했듯, 소송의 마무리도 공익적이어야 한다는 데 이견이 없었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했다.
식민지배 피해자를 지원하는 일은 사실은 정부 몫이다. 정부가 이를 방치했기 때문에 시민단체와 변호사들이 10여 년간 피해자들의 소송을 지원할 수밖에 없었다. 오랜 세월 진행된 이 같은 희생에 대한 평가도 필요하다.
그리고 시민단체가 20%를 받게 된다면 그 20%가 공익 목적으로 쓰이는가를 감시하는 것은 우리 사회의 몫이다. 아직 20%가 지급되지도 않았고 사적 용도로 쓰이지도 않은 상태에서 '반일 브로커'를 운운하며 비판부터 가하는 것은 경솔한 일이다.
보도자료에서 시민모임은 "원고의 유지를 유족들이 따를 것인지의 여부는 유족들이 결정하실 일입니다"라고 명시했다. 20% 지급에 대한 약속 이행을 유족들의 뜻에 맡기겠다는 의미로도 해석될 수 있는 대목이다. 이 사안이 크게 보도됐기 때문에 이런 입장을 표명했을 수도 있지만, 이는 시민모임이 금전 자체에 크게 집착하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다.
24일 하루 동안 일어난 위와 같은 일들은 식민지배 문제 해결과 관련해 다행과 우려를 동시에 품게 만든다. 외교부가 양금덕 할머니에 대한 서훈에 협조하겠다는 태도를 밝힌 것은 다행이다. 함정이 있을 수도 있지만, 서훈 재개 자체는 바람직하다. 동시에, 외교부 관계자의 발언이 인용된 <조선일보> 보도가 피해자와 소송대리인단·지원단체를 갈라놓을 가능성이 있다는 점은 우려스러운 일이다.
양금덕 할머니 같은 피해자들이 법정투쟁을 이어올 수 있었던 데는 피해자 본인들의 의지와 더불어 국민적 응원이 결정적 기여를 했지만, 소송대리인단과 지원단체의 희생 역시 컸음을 부인할 수 없다. 피해자 측과 소송대리인단·지원단체의 사이가 소원해지면 이 문제의 투쟁 역량이 그만큼 약해지기 쉽다는 점도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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