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를 어릴때 업어키운 누나가 있습니다
박정희가 대통령되고 주위일가친척들의
사적인 청와대방문을 엄격히 금지할때
누나의 아들이 청와대 비서실에 청탁을 넣어
택시3대를 대출받아 회사를 차렸던 적이 있습니다
나중에 알게된 박정희가 청탁을 들어준 비서관을
파면하고 택시 3대를 압수해 불에태운 사건이
있었죠
총에맞아 죽고나서도 물려줄 재산이 없어서
박근혜는 주위의 도움을 받아 생활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박정희보고 스위스 300조 비자금
으로 유언비어 퍼뜨리고 나중엔 아니면말고
언론의자유를 외치던 민주당이 가소롭기만
하네요
이곳 대깨들이 아무리 박정희 지울려고
설처바도 진실은 드러나는법
오늘날 이만큼살게된데에는 우리국민들의
근면성도 큰역활을 했지만
춥고 못살던시절 미래를 보고 카이스트 만들고
고속도로 만들고 제철소 조선소등 중공업의 기틀을
닦은 박정희의 리더쉽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부유한 한국이 없었거나 늦어졌을겁니다
박정희가 청렴했다니... ㅎㅎㅎㅎ
일본애들이 본인들 덕분에 우리나라가 근대화 되었다고 하는 헛소리랑 비슷하네... ㅎㅎㅎ
박정희가 아니었으면 더 발전했을 거 같지 않아? ㅎㅎㅎㅎ
박정희 죽고 나서 더 발전하지 않았어? ㅎㅎㅎㅎ
日경찰, ‘김대중 납치 사건’ 자료 일부 공개...‘중정 소행’ 증거 넘쳤다
https://www.khan.co.kr/world/japan/article/202312251210001?utm_source=urlCopy&utm_medium=social&utm_campaign=sharing
현장에 범인이 남긴 배낭에 대한 수사에서도 김씨의 흔적이 확인됐다. 경찰은 해당 배낭을 판매한 업체에 대한 수사를 통해 구매자를 2명으로 특정했는데, 이들 중 김씨를 닮은 남성이 있었다는 증언을 업체 관계자로부터 얻어낸 것이다. 앞서 경찰이 납치 현장에서 김씨의 지문도 채취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를 범인으로 추정할 수 있는 다양한 증거들을 확보했던 것으로 풀이된다.
증거를 확보한 경찰은 사건 발생 한달여 뒤인 1973년 9월 김씨의 임의 출석을 위해 외무성에 협조를 구했으며, 출석 시간과 장소에 대해서는 본인 상황을 고려해주겠다는 입장을 밝혔던 것으로 전해졌다. 하지만 김씨를 비롯한 용의자들은 일본을 떠난 상태였다. 또한 박정희 정권은 관련 사실을 완강히 부인하고 관련자 출석 등에 대한 협조를 거부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 사건은 그 뒤 정치적 합의로 모호하게 종결되는 운명을 맞았다. 당시 한국의 김종필 총리가 사건 발생 3달만인 11월에 일본을 방문해 다나카 가쿠에이 총리와 회담을 벌였고, 일본 측이 수사를 사실상 종결시키기로 합의한 것이다. 중앙정보부는 용의자인 김씨를 해임했으나 형식적인 것이었고, 그는 1년 뒤 복직된 뒤 8년여간 근무하다 1982년 퇴직한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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